영화 ‘미션’ 너머: 파라과이 예수회 선교 유적의 감춰진 이야기

[남미동아뉴스]



198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비롯한 유수의 상을 휩쓴 영화 ‘미션’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숭고한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과수 폭포를 배경으로 펼쳐지며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화의 성공은 남아메리카, 특히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국경 지대에 위치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영화가 담지 못한, 스크린 너머의 더 깊고 풍부한 이야기가 파라과이의 고요한 땅에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1609년, 장차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가 될 지역의 변방에 도착했다. 그들은 예르바 마테를 중심으로 한 농업의 잠재력과 파라나 강 유역의 풍부한 담수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된 목표는 세속 당국, 특히 식민지 브라질을 횡행하며 원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가던 반데이란테스의 박해를 받던 과라니족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파라과이의 수도인 아순시온은 스페인 남아메리카의 주요 인구 중심지 중 하나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흩어져 살던 원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정착시킨다는 의미의 스페인어 ‘레두cciones’로 알려진 약 30개의 선교 마을이 넓은 지역에 걸쳐 세워졌다. 이 선교 마을들은 질병과 악습뿐만 아니라 착취적인 광산주와 지주들로부터 원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페인 정착민들의 접근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선교 마을들은 일반적으로 1,000명에서 5,000명의 과라니족을 수용했으며, 일부는 그 규모가 훨씬 더 컸다. 과라니족은 농업, 가죽 무두질이나 목공예와 같은 수공예 기술을 배웠고, 예술 교육도 받았다. 특히 음악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767년 예수회가 추방될 무렵, 이 선교 마을들은 10만 명이 넘는 비유럽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파라과이 남부에는 7개의 예수회 선교 마을이 건설되었다. 이들은 유사한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는 독특한 예배당이나 예술 작품으로 두드러졌다. 1632년에 설립된 산 코스메 이 다미안 선교 마을은 천문 관측소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더 자세한 목록은 visitparaguay.travel 웹사이트의 ‘Jesuit Route’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헤수스 데 타바랑게와 트리니다드 델 파라나, 그리고 작은 마을 산타 마리아 데 페는 예수회의 웅대한 비전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1685년에 설립된 헤수스 데 타바랑게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무데하르 양식(기독교-아랍 양식) 건축물을 자랑한다. 목요일부터 일요일 밤에는 3D 프로젝션 쇼를 통해 선교 마을의 역사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1706년에 세워진 트리니다드 델 파라나는 밀라노 건축가 후안 바티스타 프리몰리의 설계를 따라 1745년경에 지어진 거대한 교회의 뼈대와 학교, 회랑, 작업장, 종탑, 공동묘지, 채소밭 등의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날씨가 좋은 저녁에는 빛과 소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산타 마리아 데 페는 앞의 두 곳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은 예수회 시대의 집이 있는 고요한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박한 마을이다. 이 집 안에는 과라니족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약 50점의 성인 및 성상 조각품이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파라과이는 가난하고 내륙 국가이며 대부분의 여행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에, 이 귀중한 유적들을 직접 방문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새소리, 곤충들의 울음소리, 붉은 흙, 습한 날씨, 그리고 무엇보다 북적거리는 인파가 없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예수회 선교 마을의 전성기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2~3일 동안 두 곳의 유네스코 유적지와 한두 곳의 다른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이곳을 탐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여정 중에 웅장한 이과수 폭포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크고 많은 방문객이 찾는 산 이그나시오 미니 선교 유적지에 잠시 들르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현대 파라과이의 역사는 억압, 부패, 독재로 점철되어 왔지만, 1609년부터 1767년까지 이 땅은 세계 역사상 가장 인도적이고 인간적인 ‘식민지’ 중 하나였다. 예수회의 숭고한 이상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거대한 스크린이 아무리 훌륭하게 재현해낸다 할지라도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파라과이의 예수회 선교 유적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닌, 인간의 연대와 헌신, 그리고 문화의 융합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야기의 살아있는 증거이다.




예수회 선교단의 역사적 배경: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예수회는 교육과 선교 활동에 헌신적인 수도회였다. 그들은 유럽 사회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여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남아메리카에서는 특히 원주민 보호와 교육에 힘썼으며, 이는 당시 식민 통치 세력의 이익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예수회)

과라니족의 문화와 생활: 과라니족은 남아메리카의 넓은 지역에 걸쳐 살았던 토착 민족으로,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농경과 수렵을 통해 생활했으며, 공동체 중심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예수회 선교단은 과라니족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출처: 위키백과 – 과라니족)

예수회 선교 마을의 운영 방식: 예수회 선교 마을은 단순히 종교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자립을 목표로 운영되었다. 공동 노동과 생산을 통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다양한 수공업 기술을 교육하여 생산품을 교역하기도 했다. 또한, 학교와 병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원주민들의 교육과 복지에 힘썼다.

(출처: UNESCO – Jesuit Missions of La Santísima Trinidad de Paraná and Jesús de Tavarangue)

예수회 추방의 배경: 예수회의 급성장과 원주민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식민 통치 세력과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은 예수회의 독립적인 운영 방식과 경제적 영향력을 우려하여 18세기 후반 예수회를 식민지에서 추방하는 결정을 내렸다. (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 – 예수회 추방)

영화 ‘미션’의 역사적 사실과 허구: 영화 ‘미션’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삶과 원주민 보호 노력을 감동적으로 그려냈지만, 일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배경은 주로 이과수 폭포 지역이지만, 실제 예수회 선교 마을은 파라나 강 유역에 더 많이 분포했다. 또한, 영화에는 과라니족의 저항과 갈등이 일부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출처: 영화 ‘미션’ 관련 다큐멘터리 및 역사 분석 자료])

이처럼 파라과이의 예수회 선교 유적은 영화 ‘미션’을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과라니족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파라과이를 방문하여 이 역사적인 장소들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스크린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한 감동과 깨달음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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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남미동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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